주머니 속에 500원짜리 동전과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만세교리 노인들이 이 돈을 쥐고 매일 향하는 곳은 마을 인근 공공 목욕탕이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지만, 목욕탕으로 향하는 일방통행로에 들어서면 노인들의 걸음은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로워진다.
주머니 속에 500원짜리 동전과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만세교리 노인들이 이 돈을 쥐고 매일 향하는 곳은 마을 인근 공공 목욕탕이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지만, 목욕탕으로 향하는 일방통행로에 들어서면 노인들의 걸음은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로워진다.

주머니 속에 500원짜리 동전과 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만세교리 노인들이 이 돈을 들고 매일 향하는 곳은 마을 인근 공공 목욕탕이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몇 안 되는 외출이지만, 목욕탕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 이들의 걸음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워진다.

차도와 보행자를 나누는 인도는 없다. 도로 중앙을 표시하는 중앙선도, 차량의 진입을 막을 연석도 없다. 한때 임시로 설치됐던 주황색 라바콘마저 어느 날 사라졌다.

넓은 아스팔트 위로 덤프트럭과 승용차, 자전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뒤엉킨다. 차량이 핸들을 조금만 잘못 꺾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 라바콘마저 사라진 ‘위험한 통행로’

만세교리의 일방통행로는 사실상 보행자와 차량이 함께 이용하는 혼합도로다. 하지만 보행자 안전을 위한 시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노인들은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길 가장자리로 몸을 붙인다. 대형 화물차가 지나가면 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던 승용차가 경적을 울리면 황급히 몸을 피한다.

주민 A씨는 “예전에는 최소한 라바콘이라도 있어서 차량이 가장자리로 붙지 못하게 했다”며 “그마저 치워진 뒤에는 사람들이 도로 한복판에 내몰린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곳을 지나는 주민들에게 목욕탕은 가까운 생활시설이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매일 감수해야 하는 위험 구간이 됐다.

■ 인터체인지 공사 뒤 사라진 인도

주민들은 현재의 보행환경이 만세교 인터체인지 공사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과거 인터체인지 공사 당시 주민들은 보행 통로가 사실상 사라지는 설계에 반발해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을 상대로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과 본안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 과정에서 주민들이 선임한 변호사가 재판에 제대로 출석하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패소했고, 결과적으로 다리 아래를 통과하는 좁고 어두운 하부 통로 하나만 남게 됐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주민 A씨는 이후 의정부국토관리사무소에 지속적으로 인도 설치를 요구했고, 그 결과 만세교 검은색 교량 한쪽에 간신히 보행공간이 마련됐다. 하지만 반대편 도로와 연결되는 구간은 여전히 끊겨 있다.

인도가 있어도 이어지지 않으면 주민들은 다시 차도로 내려설 수밖에 없다. 보행로가 안전시설이 아니라 ‘중간에 끊긴 통로’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 “전임자가 한 일이라 모른다”… 책임 떠넘긴 행정

주민들이 사라진 보행 안전시설의 경위를 묻자 행정기관에서는 책임 있는 답변을 듣기 어려웠다고 호소한다.

담당 공무원이 “당시 가처분 소송 서류를 직접 찾아오라”거나 “전임자가 한 일이라 잘 모른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주민 입장에서는 과거 공사와 소송, 보행시설 설치 과정을 모두 직접 추적해야 하는 상황이다. 행정기관이 보관하고 있어야 할 자료와 사업 이력이 주민에게 다시 떠넘겨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주민들은 “시설이 왜 사라졌는지, 누가 철거했는지, 대체시설은 무엇인지 행정기관이 확인해야 한다”며 “주민에게 과거 서류를 찾아오라고 하는 것은 책임 회피”라고 말했다.

■ 해법은 ‘캔틸레버식 인도’… 기존 교량 활용 가능

주민들은 대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포천시 주요 교량에서 활용하는 방식처럼 기존 교량 난간 바깥쪽에 철골 구조물을 덧대 보행로를 확장하는 ‘캔틸레버식 인도’를 설치하고, 보행자용 난간을 마련하면 단절된 보행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캔틸레버식 인도는 교량 자체를 전면 재시공하지 않고도 기존 구조물의 바깥쪽에 보행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다. 다만 실제 설치를 위해서는 교량 구조 안전성, 하중, 배수, 난간 기준 등에 대한 정밀검토가 필요하다.

도로 폭이 확보된 구간에는 차로를 재조정해 노견 보행로를 만드는 방안도 제시됐다.

주민들은 “현장 여건을 확인하고 구조검토를 진행하면 여러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며 “안 된다는 결론부터 내리지 말고 가능한 방법을 검토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고 위험을 이유로 금주 3리에서 만세교 1리 쪽으로 자리를 옮긴 철원·운천 방향 버스정류장. 이곳에는 비바람과 폭염을 피할 지붕도, 잠시 다리를 쉴 벤치도 없다.
사고 위험을 이유로 금주 3리에서 만세교 1리 쪽으로 자리를 옮긴 철원·운천 방향 버스정류장. 이곳에는 비바람과 폭염을 피할 지붕도, 잠시 다리를 쉴 벤치도 없다.

■ 버스정류장에는 표지판 하나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주민들도 안전과 편의에서 소외돼 있다.

사고 위험을 이유로 금주3리에서 만세교1리 방향으로 옮겨진 철원·운천 방면 버스정류장은 비바람과 폭염을 피할 지붕이 없다. 잠시 앉아 쉴 벤치도 없고, 빗물이 고여 흙탕물이 튀는 바닥에는 배수시설도 마련돼 있지 않다.

현장에 설치된 것은 ‘버스정류장’이라고 적힌 쇠말뚝 형태의 표지판 하나뿐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승객들은 우산을 쓴 채 도로 가장자리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바닥에 고인 물을 피하려다 차도 쪽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출퇴근길 이곳을 이용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은 “정류장이라고 하기에는 최소한의 시설도 없다”며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만이라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차량 통행량과 사고 빈도를 무시한 '마을 주민 보호 구간' 속도 제한 역시 탁상행정의 민낯을 보여준다. 사진은 포천동의 마을주민보호구간 제한속도 안내
차량 통행량과 사고 빈도를 무시한 '마을 주민 보호 구간' 속도 제한 역시 탁상행정의 민낯을 보여준다. 사진은 포천동의 마을주민보호구간 제한속도 안내

■ 제한속도는 구간마다 제각각… 주민 보호는 표지판에만

차량 통행량과 사고 위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제한속도 운영도 문제로 지적됐다.

대형 화물차와 과속 차량이 자주 오가는 만세교리 일대는 시내 중심가보다 보행 위험이 큰 구간이다. 그러나 일부 구간의 제한속도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게 설정돼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주민들이 경찰에 여러 차례 속도 하향을 요청했지만, “교통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된 사안”이라는 답변만 반복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현장 상황이 바뀌고 사고 위험이 커졌다면 제한속도도 다시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한 번 정해진 속도 기준을 이유로 주민 요구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 보호 구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주민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보호구간 표지판만 세워 놓고 보행로와 속도 저감시설, 조명, 방호시설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안전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형 화물차와 과속 차량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만세교리 구간은 시내 중심가보다 훨씬 위험하지만, 제한속도는 오히려 느슨하게 풀려 있다.
대형 화물차와 과속 차량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만세교리 구간은 시내 중심가보다 훨씬 위험하지만, 제한속도는 오히려 느슨하게 풀려 있다.

■ 보행권은 복지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

만세교리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거창한 개발사업이 아니다.

목욕탕까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인도, 차량과 보행자를 분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 비를 피할 수 있는 버스정류장, 실제 위험을 반영한 제한속도와 단속체계다.

하지만 현재 주민들이 마주한 현실은 끊긴 보행로와 덩그러니 남은 표지판, 사라진 라바콘, 책임을 떠넘기는 행정 답변이다.

500원짜리 목욕탕을 오가는 노인의 보폭보다 행정의 대응이 느리다는 주민들의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만세교리에서 보행권은 헌법이나 조례 속 추상적인 문구가 아니다. 주민들이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마주하는 생존의 문제다.

관계기관이 더 늦기 전에 현장 합동조사와 보행환경 개선계획을 마련하고, 단절된 인도와 정류장 시설, 제한속도 운영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시사큐브 양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