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전국 청소년 토론 축제 심사위원 연수에서 ‘한국식 확장형 토론’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신동명 박사. [사진=시사큐브]](https://nnotwacry2xmbpev.public.blob.vercel-storage.com/articles/1792769297136-5sy6v2.jpg)
[시사큐브=양동원기자] “우리가 떨어진 이유를 당장 밝히란 말입니다!”
과거 다양한 토론 대회의 심사위원장으로 현장을 찾았던 신동명 박사는 탈락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심사위원들에게 몰려와 따지는 중학생들을 보며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기존 토너먼트식 토론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대개 전교 1등부터 6등까지 성적순으로 선발된 아이들이다. 평소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데다, 대회 직전 교장실에 불려 가 “꼭 상을 타 오라”는 특명까지 받고 나온 터라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준비 과정의 병폐는 더욱 심각하다. 학교에서 폭탄 돌리기 끝에 토론 지도를 맡게 된 막내 교사가 예상 질문과 모범 답안을 빼곡히 만들어 학생들에게 통째로 외우게 한다. 실전에서 상대측 반론자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면, 학생은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암기 문장을 태연하게 읊어댄다. 발언과 동시에 채점표를 기록하느라 바쁜 심사위원들은 맥락도 모른 채 점수를 매긴다. 신 박사가 기존 서구식 토론 대회를 가리켜 “토론 대회가 아니라 사실상 암송 대회로 전락했다”고 꼬집는 이유다.
제23회 전국 청소년 토론 축제의 100분 실전 설계도는 이처럼 기형적으로 변질된 암기식 경쟁을 뿌리 뽑고, 교실에 들어선 학생 전원을 능동적인 주체로 세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 도서 투표와 바둑돌 추첨, 그리고 사과 상자에서 탄생한 ‘14각 토론고리’
본 행사는 독서토론과 구술면접을 교차 진행하는 100분 로테이션(초등 1·2학년은 구술면접 없이 토론만 진행)으로 운영된다. 학생들은 명찰에 적힌 A팀·B팀 표시에 따라 이동하며, 오후 2시 교실 입실과 함께 어른의 개입을 배제한 첫 번째 절차를 밟는다.
가장 먼저 후보 도서 두세 권 중 당일 토론할 책을 학생들이 직접 투표용지에 적어 결정한다. 시작부터 아이들 스스로 무대의 주인이 되게 하는 장치다. 이어 주머니 속 바둑돌을 뽑아 흰돌팀(10명)과 검은돌팀(10명)으로 나뉜다.
본격적인 토론의 문을 여는 핵심 도구는 특허 교구인 ‘토론볼(14각 토론볼)’다. 이 교구는 과거 신 박사가 서울 정독도서관에서 학교 사서 교사 150명을 대상으로 강의할 당시, 선배들의 빨간 펜 첨삭 지도와 『군주론』 같은 난해한 텍스트, 이른바 ‘발문지 작성’의 압박감에 짓눌려 토론 공포증을 호소하던 교사들을 보며 고안해 낸 산물이다.
그는 누구나 쉽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사과 상자에 흰 종이를 바르고 정약용의 『목민심서』 주요 주제를 여섯 면에 붙인 뒤 상자를 굴려 나오는 주제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여기에 ‘무엇무엇은 네모(□)다’라는 직관적인 문장 틀을 결합해 ‘키워드 토론법’을 완성했다. 초기 12각 알록달록한 색상 교구를 쓰던 시절, 포항 지역의 한 학생이 한 달 만에 색상별 키워드 위치를 외워 긴장감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지금의 무채색 14각 구조로 개량했다.
실제 대회장에서는 흰돌팀과 검은돌팀이 각자 벽면으로 모여 10분간 ‘1차 생각 나누기’를 진행한다. 10명의 학생이 책의 핵심 키워드를 7개로 압축해 교구에 꽂기 위해서는 치열한 의견 조율과 친구들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온 학생이라도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줄거리와 핵심 쟁점을 파악하게 된다.
교구에 14개의 키워드가 채워지면 학생들이 직접 나와 공을 굴린다. 가령 『심청전』을 읽고 ‘인당수’, ‘효녀’, ‘연꽃’, ‘공양미 300석’, ‘심봉사’ 등의 단어가 나왔다면, 공을 굴린 학생에게 “심청이는 네모다”라는 질문이 주어진다. 학생이 “심청이는 효녀다”라고 답하면, 그때부터 찬반 구분 없이 “효녀라면서 왜 눈먼 아버지를 홀로 두고 죽음을 택했는가” 등 스토리텔링과 찬반을 넘나드는 20분간의 1차 독서토의가 펼쳐진다. 앉아서 말하든 서서 말하든, 책 밖의 다른 사건과 연결하든 지적 확장을 위한 모든 발언이 허용된다.
■ 학생이 직접 만드는 찬반 주제와 ‘1인 2표제’의 마법
5분의 짧은 휴식이 끝나면 2라운드 찬반 토론이 시작된다.
주목할 점은 찬반 논제 역시 교사나 주최 측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0분 동안 학생들이 직접 1차 토의에서 부딪혔던 쟁점들을 모아 칠판에 5~7개의 찬반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한 가지 주제로 지루하게 끌기보다 여러 주제를 호흡 짧게 다루는 것이 청소년의 집중력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어 각 팀에서 토론을 통해 대표자를 뽑고, 영국 의회식 토론처럼 가위바위보나 동전 던지기로 찬성·반대 입장을 정한 뒤 10분간의 2차 생각 나누기와 35분간의 열띤 찬반 토론에 돌입한다. 주최 측은 내년부터 체험 교육에 3회 이상 참여한 학생들에게 ‘청소년 퍼실리테이터’ 자격증을 부여해, 대회 진행까지 학생들에게 온전히 맡길 계획이다.
토론이 끝나면 이 축제의 백미로 꼽히는 ‘학생 상호 투표’가 진행된다. 초창기 고등학생 논술·토론 대회 시절에는 “전문가도 아닌 애들에게 투표를 시킨다”며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지만, ‘슈퍼스타K’ 같은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사법부의 배심원제가 증명하듯 다수의 집단지성이 한 명의 심사위원보다 훨씬 객관적이라는 것이 신 박사의 지론이다.
투표 방식은 독특한 ‘1인 2표제’다. 1인 1표제를 적용했던 초기에는 상을 받으러 온 학생들이 가장 잘한 경쟁자의 이름을 적을지, 자신의 이름을 적을지 양심의 갈등을 겪느라 큰 고통을 호소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두 명을 적게 하자 아이들은 주저 없이 한 표는 오늘 가장 잘한 친구에게 던지고, 나머지 한 표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자 가장 공정한 평가가 이뤄진 것이다. 단, 동일 인물을 두 번 적으면 무효 처리되며, 학원 단위의 조직적인 ‘밀어주기’를 방지하기 위해 학생 투표는 1점, 심사위원 투표는 5점으로 가중치를 두는 방어 장치를 마련했다.
■ 피겨스케이팅 점수제 도입과 국제협상력 기르는 6분 구술면접
주관식 경기에 가까운 토론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사 방식은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 채점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
교실마다 3명의 심사위원이 배치된다. 심사위원들은 학생이 입을 열자마자 채점하지 않는다. 서먹함을 풀고 숨은 리더십과 경청 태도가 드러나는 시점인 ‘시작 후 5분 뒤’에 1차 채점을 진행한다. 기준 점수는 3점이며, 잘하면 4점, 부족하면 2점을 부여한다. 변별력을 위해 최고점인 5점은 단 한 명에게만 부여하도록 규정했다. 2차 찬반 토론 때는 심사위원들이 맡았던 팀을 서로 교차해 채점함으로써 편향을 막는다.
여기에 대미를 장식하는 4차 평가는 2인 1조로 진행되는 6분간의 ‘스피드 구술면접’이다. 심사위원 2명 앞에 마주 앉은 두 학생은 “30년 뒤 나의 모습은 어떨까” 같은 열린 질문부터 즉석 가위바위보로 나뉜 찬반 주제까지 6분 동안 3개 이상의 주제를 숨 가쁘게 주고받는다.
신 박사는 구술면접에서 가위바위보로 입장을 강제 배정하는 이유에 대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예로 들었다. 그는 “협상안이 통과되면 한국 농민이 큰 타격을 입는다는 사실을 미국 협상단도 알지만, 그들은 철저히 미국의 국익을 위해 싸운다”며 “내 본래 생각과 다른 위치에 놓이더라도 주어진 입장에서 논리를 세워 방어하고 이겨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 토론이며, 이 훈련이 곧 글로벌 시대의 국제협상력으로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구술면접에서는 논점 일탈, 상대 논리에 휩쓸리는 입장 편승, 일관성 포기 여부와 함께 대선 후보 토론처럼 승패를 좌우하는 ‘전달 태도’가 집중 평가된다.
3인의 심사위원과 학생 투표, 구술면접까지 총 4단계의 다층 평가가 누적 평균화되면서, 지난 30여 년간 이 대회에서는 수상 심의를 둘러싼 잡음이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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