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시사큐브, AI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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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일 팔당댐 앞 풍경은 역설 그 자체였다. 남양주시장과 시민단체 50여 명이 모여 “수십 년 규제 희생에 보상은커녕 불이익만 돌아온다”며 불합리한 권역 지정을 규탄하고 나섰다.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간 개발을 참아온 도시가, 이제는 그 희생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불이익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호소다.

남양주의 사정은 의정부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두 도시 모두 서울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다. 남양주는 팔당 상수원을, 의정부는 군사도시·접경도시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간 중첩규제를 감내했다. 그런데 국가는 그 희생에 대한 보상 대신 ‘수도권’이라는 무정한 딱지 하나를 붙였다. 그 딱지가 붙는 순간, 모든 불합리한 규제는 정당화된다.

남양주가 겪는 권역 지정의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보전권역으로 묶여 공장 하나, 대학 하나 들여오기 힘든데, 정부 지원사업이나 공모사업에서는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가차 없이 배제된다. 규제는 비수도권보다 더 세게 받고, 혜택은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하는 이중차별 구조다. 이는 의정부 시민이 겪어온 대출규제 공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의정부 집값은 지난 정부 내내 제자리였다. 강남이 폭등할 때도 의정부는 조용했다. 그럼에도 DSR, LTV, 전세대출까지 강남과 똑같은 잣대로 목을 옥죄었다. 시민이 하소연하면 돌아오는 답은 늘 “나라 정책이라 어쩔 수 없다”였다. 남양주 시민이 “수십 년을 희생했는데 왜 불이익만 주느냐”고 외칠 때 돌아오는 답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획일적 권역 지정의 민낯이다.

■ 다락원 2,600호가 묻는 질문, 규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지점에서 다락원지구 2,600호 논란은 단순한 택지 공급 논쟁을 넘어선다. 국가는 필요할 때만 ‘수도권’이라는 논리를 소환한다.

대출을 옥죌 때는 “수도권이니까 같이 규제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주택 공급 실적이 급할 때는 “국가사업이니까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밀어붙인다. 시민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규제는 왜 그토록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고, 주택 공급은 왜 이토록 유연하기만 한 것인가.

남양주시장의 외침은 그래서 의정부 시민의 목소리와 강하게 겹친다. “획일적 권역 분류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결국 “지역의 현실을 제발 똑바로 봐달라”는 절규다. 팔당의 물을 지키느라 성장을 포기한 도시와, 강남 집값을 잡겠다며 대출을 옥죈 도시가 똑같은 불이익을 받는 현실이 과연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보상 없는 희생 위에 세워지는 집은 누구를 위한가

정부가 진정으로 수도권 정비를 고민한다면, 숫자로 2,600호를 찍어내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수십 년간 국가와 서울을 위해 희생해 온 도시들에 대해 누가 얼마나 고통을 감내했는지 되짚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따져보는 일이다. 남양주에는 중첩규제에 대한 합리적인 차등을, 의정부에는 강남과 판이한 지역 경제 및 대출 현실에 부합하는 차등을 적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보상 없는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주택 공급의 짐만 떠맡기는 정책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팔당댐 앞에서 외친 남양주의 절규가 의정부 다락원 부지에서 메아리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이 묻는 것은 단 하나다.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불이익만 주다가, 서울의 주거 난을 해소할 필요가 생길 때만 수도권이라는 명목으로 거대한 베드타운을 짓겠다는 것인가. 그 2,600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집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않는 한, 정부가 내놓는 어떤 권역 지정도, 어떤 공공주택지구 계획도 의정부 시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