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롤을 내리는 엄지손가락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앞지른 지 오래다. 1분 안팎의 쇼츠와 릴스가 시신경을 자극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즉각적인 도파민만 남을 뿐, 문장과 문장 사이를 메우던 사유의 여백은 증발했다. 알고리즘은 내가 이미 좋아하거나 분노할 만한 정보만을 끝없이 밀어 넣으며 우리를 각자의 확증편향이라는 ‘필터 버블’ 안에 가둔다. 모두가 세상을 빠르게 ‘훑어(Scannig)’ 보지만, 누구도 세상을 온전히 ‘읽어내지(Reading)’ 못하는 문해력 결핍의 시대다.
이 숨 가쁜 속도전의 한복판에서, 가장 첨단의 속도로 의정 소식을 전하는 경기도의회 뉴미디어팀 강희택 팀장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새벽, 신문을 읽는다》를 펴냈다. 뉴미디어를 다루는 공직자가 종이신문과 활자의 가치를 주창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깊은 울림을 준다. 새것과 옛것의 단순한 대립 구도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삼켜버린 ‘깊이’와 ‘우연한 발견’의 가치를 복원하자는 절박한 제안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아오른다”고 했다. 하루의 사건과 역사가 완전히 끝나 객관화된 뒤에야 비로소 지혜와 성찰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강 팀장의 부엉이는 황혼이 아닌 ‘새벽’에 날아올라 신문을 펼친다. 밤새 인쇄기를 빠져나와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신문 지면을 넘기며, 어제의 격랑을 지나 오늘을 살아낼 통찰을 길어 올리는 행위다.
종이신문을 읽는 경험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포털과 SNS는 내가 입력한 검색어와 클릭 기록만을 편식하게 만들지만, 활짝 펼쳐진 신문 지면은 예측할 수 없는 ‘지적 조우’를 선물한다. 정치 기사를 보려다 우연히 마주친 지구 반대편의 기아 문제, 문화면 구석에 자리한 낯선 시인의 부고, 일상의 평범한 커피 한 잔에 얽힌 문명사까지. 지면을 가로지르는 시선은 내가 미처 몰랐던 타인의 삶과 세계의 단면에 닿으며 공감과 확장의 지평을 열어준다.
책이 넬슨 만델라와 체 게바라 같은 역사적 인물의 선택부터 홍범도 장군과 매카시즘, 일상의 고양이와 중력, 장애와 혐오의 언어까지 전방위로 시선을 뻗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신문 지면이라는 거대한 그물망을 통해 건져 올린 파편화된 세상의 조각들을 저자 특유의 성찰로 꿰어내 ‘사람 사는 세상’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공의 언어를 다루는 공직자로서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자못 무겁다. 오늘날 수많은 정책과 조례, 예산안의 텍스트는 시민의 삶과 직결되지만, 정작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자극적인 카드뉴스 한 장과 몇 줄의 자극적 헤드라인으로 파편화되고 있다. 행정이 본질을 설명하지 않고 자극만을 좇을 때, 시민 역시 행간을 읽지 못하고 오독과 혐오의 늪에 빠진다. 결국 문해력은 개인의 독서 습관을 넘어, 민주주의 공동체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자본인 셈이다.
한 권의 책이 도파민에 중독된 스크롤의 속도를 단숨에 늦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찻잔을 곁에 두고 종이신문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 사람의 태도는 조용한 저항이 된다. 효율과 요약이 미덕이 된 시대, 강희택의 부엉이가 펼쳐 든 신문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세상을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고요히 ‘읽어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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