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후 2시, 경기 포천시 화현면 광암이벽유적지 야외무대 모습
지난 24일 오후 2시, 경기 포천시 화현면 광암이벽유적지 야외무대 모습

10월의 산바람은 옷깃 틈새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난 24일 오후 2시, 경기 포천시 화현면 광암이벽유적지 야외무대. 머리 위로는 묵직한 먹구름이 잿빛 장막처럼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흙냄새 섞인 찬 공기가 뺨을 에워쌌다. 언제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궂은 날씨였다.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식 객석을 먼저 채운 것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였다. 관객들은 저마다 챙겨온 보라색 폼 방석과 얇은 비닐 돗자리, 납작하게 밟아 접은 택배 박스를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 두툼한 패딩 점퍼와 카키색 윈드브레이커 지퍼를 턱 끝까지 바짝 올린 이들은 종이컵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 김에 언 손을 녹이며 반원형 흰 천막 무대로 시선을 모았다.

무대 위 조명이 켜지자 적막을 깨고 옥빛 도포를 입은 배우가 걸어 나왔다. 뒤편에는 붉은 창살 구조물과 커다란 백색 십자가가 서늘한 가을 들녘을 등진 채 묵직하게 버티고 섰다.

배우의 목을 타고 터져 나온 낭랑하고 비장한 가락의 첫 소절. 그 소리는 고요하던 유적지 풀숲 너머로 길게 뻗어 나갔다. 성리학의 견고한 철옹성에 갇혀 있던 조선 후기, 서학(西學)을 마주하며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다 스러져간 이벽의 번뇌가 떨리는 숨소리와 굵직한 성량을 타고 허공을 갈랐다.

무대 뒤편 둔덕에서는 누렇게 마른 갈색 억새풀이 산바람에 몸을 부딪치며 '서걱, 서걱' 메마른 소리를 냈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칭얼거리던 어린아이의 보챔도 잦아들었고, 객석 한편에서 셔터를 누르는 카메라의 날카로운 기계식 구동음만이 간간이 정적을 흔들었다.

패딩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은 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한 중년 남성은 낮은 목소리로 감회를 털어놓았다.

"날이 궂고 바람이 차서 관객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벽 선생의 고향 땅에서 이 서늘한 공기를 직접 마시며 음악극을 보니 240년 전 그분의 고뇌가 살갗으로 와닿는 기분입니다."

이번 무대는 지역 예술단체 '아라연극놀이터'가 주최·주관하고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한 '2026 경기북부 지역문화 특성화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광암 이벽의 삶과 사상을 본격적인 서사의 음악극으로 무대화한 전국 최초의 시도다.

공연을 마친 뒤 임태순 감독은 "초연 무대라 미흡한 점도 많았지만,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뜻깊은 발걸음을 해주신 관객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무대를 더욱 다듬고 보완해 광암 이벽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더 깊은 울림으로 전하겠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조명이 꺼진 뒤에도, 닫힌 시대를 뚫어내려 했던 한 선비의 치열했던 외침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포천 들녘의 잿빛 공기 속에 한동안 긴 여운으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