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점인 반구정은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마지막 집이었다.[사진=경기관광공사]](https://nnotwacry2xmbpev.public.blob.vercel-storage.com/articles/1790921343565-p8d15k.jpg)
가을은 걷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하다. 이 계절에 임진강을 따라 걷는 길,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이다.
평화누리길은 김포, 고양, 파주, 연천까지 경기 북쪽 끝을 잇는 189km의 길이다. 2010년 열렸고, 총 12개 코스로 나뉜다. 철책을 옆에 두고 걷는 길이라 처음엔 긴장되지만, 걷다 보면 분단의 풍경보다 자연과 역사의 결이 먼저 들어온다. 경기도가 ‘DMZ 사색(四色)하다’며 10월의 코스로 8코스를 꼽은 이유다.
13km, 네 시간. 파주 반구정에서 시작해 임진각·평화누리를 거쳐 장산전망대, 화석정, 율곡습지공원까지 이어진다.
![평화누리길 모습 [사진=경기관광공사]](https://nnotwacry2xmbpev.public.blob.vercel-storage.com/articles/1790921498291-47htwc.jpg)
갈매기를 벗 삼은 정자
시작점인 반구정은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마지막 집이었다. 87세에 관직을 내려놓고 90세까지 머물렀다는 곳. ‘반구(伴鷗)’는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이다. 단청도 화려하지 않다. 소박한 기둥 몇 개가 임진강을 향해 서 있을 뿐이다. 그 소박함이 청백리라 불린 그의 삶과 겹친다. 정자 마루에 앉으면 강물이 한참을 유유히 간다. 갈매기 몇 마리가 강 위에 점을 찍는다. 600년 전 노재상이 봤을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 지금은 철책이 시야를 가르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이곳은 시와 학문을 나누던 놀이터였다. 그 흔적이 길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망배단에서 평화의 종까지, 평화를 향해 걷다
한 시간쯤 걸으면 풍경이 달라진다. 임진각이다. 1972년, 1번 국도 끝자락에 실향민들을 위해 세운 공간이다. 고향을 향해 절을 올리던 망배단, 폭격에 휘어진 채 멈춰 선 독개다리와 녹슨 증기기관차, 평화를 염원하며 만든 평화의 종까지. 분단의 상처가 시설 하나하나에 박혀 있다. 그래서 이곳은 DMZ 평화관광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임진각을 지나면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평화누리의 잔디밭이다. 아이들은 잔디 위를 뛰고, 연인들은 돗자리를 편다. 10월의 평화누리는 특히 분주하다.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K-드라마 OST를 주제로 한 ‘2026 GHOST 페스티벌’이, 17일부터 18일까지는 파주개성인삼축제가 열린다. 바로 옆 평화누리 캠핑장은 임진강 건너 민통선을 마주한 채 가을밤을 지새우는 곳으로 캠퍼들에게는 이미 유명하다.
축제의 소음을 뒤로하면 길은 다시 한적해진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 고개 숙인 벼가 길동무다. 평탄한 농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산전망대가 나온다.
율곡이 남긴 나무, 강을 건넌 임금
전망대에서 강 건너 초평도가 보인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섬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자연 생태가 그대로 보전된 곳이다. 그래서 사진이 더 잘 나온다. 자연이 그린 풍경이라서.
마지막은 화석정이다.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다. 이곳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율곡이 주변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했는데, 임진왜란 때 그 나무 덕분에 정자에 불을 밝혀 선조 임금이 임진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일화다. 십만양병설로 전란을 내다봤던 그의 예지가 나무 한 그루를 남기는 일에서 증명된 셈이다.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인 화석정 모습 [사진=경기관광공사]](https://nnotwacry2xmbpev.public.blob.vercel-storage.com/articles/1790921413922-71ixor.jpg)
화석정을 내려서면 율곡습지공원이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도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적막이 있다. 13km의 끝이다.
황희의 청렴, 율곡의 지혜, 그리고 임진각의 그리움이 한 길에 겹쳐 있다. 600년의 시간과 70년의 분단이 임진강이라는 하나의 물줄기 위에 놓여 있는 길. 그래서 반구정길은 그냥 걷는 길이 아니라, 읽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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