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 영화 포스터 [사진=CGV캡쳐]](https://nnotwacry2xmbpev.public.blob.vercel-storage.com/articles/1790576846789-tn748t.jpg)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 경축식장에 울린 총성 하나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날의 비극을 소재로 한 영화 한 편이 다시 그 총성을 소환했다.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이다.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신기록을 세운 동시에,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역사 왜곡"이라는 날 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SBS가 9월 28일 보도한 내용을 보면, 이 논쟁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여러 갈래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흥행과 논쟁이 동시에 따라붙는 영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현상일지 모른다.
◇ 정치권이 던진 세 갈래 비판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영화가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배후를 북한이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인 것처럼 왜곡했다며, 이는 "폐륜적 범죄이자 사자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만큼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특히 과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해당 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했던 사례를 근거로 들며, 영화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특정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 서사는 표현의 자유로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명구 의원 역시 이 영화를 "황당무계한 음모론에 기반한 선동 영화"로 규정하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의학전문기자 출신 방송인 홍혜걸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짚었다. 유족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고인을 모독하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물음이다. 그는 "자기 진영엔 절대 허용되지 않을 각본도 반대 진영으로 오면 예술이 추구하는 허구라며 찬양한다"며 이중잣대, 이른바 '내로남불'을 지적했다.
◇ 감독의 방어선: "단정이 아니라 추적"
이 같은 논란을 예상한 듯 허진호 감독은 개봉 전부터 일관된 입장을 밝혀왔다. 영화는 실제 사건의 배후를 단정하는 작품이 아니라, 당시 수사에서 남은 의문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추적하는 미스터리극이라는 설명이다.
이 해명은 영화의 실제 서사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암살자(들)>은 사건의 배후를 확정된 답으로 봉합하지 않는 열린 결말을 택했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형사 박철구, 박해일이 연기하는 사회부장 김재환, 이민호가 연기하는 신입 기자 한영일—이 세 인물이 쫓는 것은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단일한 답이 아니라, 의혹 앞에서 각자가 지켜야 했던 것들의 무게다. 감독의 해명이 사후 변명이 아니라 애초의 창작 의도였다면, 영화의 서사 전략 자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 두 개의 다른 질문, 뒤섞이면 안 되는 이유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논쟁이 사실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 두 개가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첫째는 사실 관계의 문제다. 사건의 배후가 북한인지, 다른 누군가인지는 역사적 사실 확정의 영역이며 당시 특별수사본부의 공식 결론과 이후 제기된 이설(異說)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적이다. 이는 영화가 아니라 역사학과 법률의 언어로 다뤄져야 할 사안이다.
둘째는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의 문제다.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다룬 창작물이 어디까지 상상력을 허용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상상력이 고인과 유족에게 실질적 해를 끼칠 때 창작의 자유는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법리적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동시에 필요한 영역이다.
문제는 이 두 질문이 정치적 공방 속에서 하나로 뭉뚱그려질 때 발생한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남용했다"는 비판, 그리고 "진영 논리에 따른 이중잣대"라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정작 영화가 서사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 영화가 정말 그리는 것
<암살자(들)>의 제목에 붙은 괄호는 이미 답을 암시한다. '암살자'가 아니라 '암살자(들)'. 이는 사건의 배후를 쫓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총성이 남긴 의혹을 짊어져야 했던 사람들—형사, 기자, 신입 기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진실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권력의 압박 앞에서 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부, 사회부장 김재환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읽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로 배치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건의 의혹을 좇던 추적극이, 진실을 기록하고 알릴 권리를 지키려는 의지의 선언으로 확장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배후를 확정하지 않은 열린 결말을 택한 것은, 어쩌면 이 논란 자체를 예견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열린 결말이 논쟁의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창작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결과물이 유족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상처에 대한 응답은 별도로 필요하다.
◇ 남은 것은 사회적 합의
이 논란이 향후 어떻게 정리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물이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서울의 봄>, <남산의 부장들>이 그러했듯, <암살자(들)> 역시 비슷한 궤적의 논쟁을 통과하고 있다. 문제는 매번 이 논쟁이 정치적 진영 공방으로 소비되고, 정작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한 상상력인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은 축적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주진우 의원이 제기한 사자명예훼손의 법리적 검토, 장동혁 대표가 제기한 형평성의 문제, 홍혜걸이 지적한 유족에 대한 예우—이 모든 질문은 저마다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영화 한 편에 대한 찬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실존 사건을 다루는 창작의 경계에 대한 좀 더 일관된 사회적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다음에 비슷한 영화가 나왔을 때 우리는 또다시 같은 논쟁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총성은 1974년에 울렸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이며, 그것을 말할 자유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은 2026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이 논쟁이 소모적 진영 다툼으로 그치지 않고, 그 질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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